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으며 하루키가 유독 달리기를 여러 번 언급했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취미 얘기 정도로 넘기기엔, 그가 달리기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너무 진지했습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책상 앞에 앉는 것과, 매일 정해진 거리를 달리는 것을 거의 같은 무게로 다루고 있었으니까요. 소설가라는 직업과 달리기가 대체 무슨 상관이길래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걸까 싶었습니다.

그 궁금증을 안고 찾아보니, 아예 달리기만을 다룬 책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손이 갔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는 짧게 스쳐 지나갔던 그 이야기를, 이번엔 온전히 한 권 분량으로 들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컸습니다. 글쓰기라는 정신적인 작업을 이야기하던 사람이, 순전히 몸을 움직이는 일에 대해서는 또 어떤 언어로 말할지 궁금했습니다.

오늘은 이 책이 담고 있는 하루키의 러닝 이야기, 그리고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말이 상징하는 의미까지 제가 직접 읽고 느낀 감상을 바탕으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하루키는 몸을 단련하는 일이 곧 글을 쓰는 일과 같은 종류의 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작 달리기 자체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깊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렇게 찾아 읽게 된 책이 바로 이 회고록이었습니다.

또한 이 책의 원제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로웠습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진짜 하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물었던 카버처럼, 하루키 역시 ‘달리기’라는 소재를 통해 결국 다른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고, 그게 무엇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책의 구성과 개요

이 책은 하루키가 서른세 살에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동시에 달리기를 시작한 이야기부터, 이후 수십 년간 마라톤과 트라이애슬론, 울트라마라톤에 도전해온 기록을 담은 회고록입니다. 매일 10킬로미터씩 달리고, 매달 300킬로미터를 채우며, 해마다 세계 각지의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온 그의 일상이 담담하게 펼쳐집니다.

인상 깊은 몇 장면

  • 전업 작가와 러너, 같은 날 시작된 두 가지 결심 : 하루키가 운영하던 재즈 바를 정리하고 전업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던 시기, 그는 동시에 달리기도 시작합니다. 두 결심이 같은 시기에 맞물린다는 사실이 이 책 전체의 정서를 암시합니다.
  • 울트라마라톤 완주기 : 100킬로미터를 달려야 하는 극한의 레이스에 도전하며, 몸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되는 듯한 기묘한 체험을 기록합니다.
  • 소설가로 결심한 순간의 회고 : 진구 구장에서 야구를 보다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유명한 일화가 이 책에서도 다시 등장하며, 달리기와 글쓰기가 어떻게 그의 삶에서 같은 뿌리를 갖게 됐는지를 보여줍니다.

핵심 주제

재능이 아니라 지속하는 몸이 만든 작가

이 책은 하루키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몸을 단련하며 스스로를 지속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온 사람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는 불건전한 상상력을 다루는 소설가일수록 오히려 건강한 신체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정신과 육체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걸 자신의 몸으로 증명해갑니다.

하루키가 이 이야기를 통해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소설을 쓰는 재능과 신체를 단련하는 노력이 서로 무관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창작은 정신의 영역, 운동은 육체의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하기 쉽지만, 하루키는 이 둘을 하나의 연결된 시스템으로 봅니다. 소설을 쓴다는 건 매일 몇 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정신을 집중력 있게 유지해야 하는 일이고, 그 집중력을 몇 달, 몇 년씩 견뎌내려면 결국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바로 그 시기에 달리기도 함께 시작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 이미 그때부터 이 둘을 하나의 세트로 여기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루키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은, 재능이라는 신화 뒤에 가려진 것은 사실 몸을 관리하는 지루하고 성실한 노동이라는 것, 그리고 그 노동이야말로 창작이라는 화려해 보이는 일의 진짜 토대라는 것입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그만두는 건 선택이다

하루키는 마라톤의 본질을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다리가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거기서 포기할지 한 걸음 더 나아갈지는 스스로 정하는 것이라는 이 태도는, 소설을 쓰는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문장을 통해 하루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힘든 것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힘듦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구분을 아주 냉정하게 짚습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 즉 아프고 지치는 감각은 통제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신호를 ‘더는 못하겠다’는 포기의 근거로 삼을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신호로 흘려보내고 계속 나아갈지는 순전히 태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정신승리의 구호가 아닙니다. 하루키는 실제로 장거리를 뛰면서, 몸이 그만하라고 외치는 순간에도 사실은 조금 더 갈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여러 차례 확인했다고 말합니다. 소설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는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지만, 그 생각이 실제 한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걸 그는 압니다. 결국 이 대목에서 하루키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도 계속할지 말지를 선택하는 마지막 자유만큼은 늘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특징

자기 자랑도 자기 비하도 없는 담백한 회고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하루키가 자신의 러닝 이력을 과시하지도, 지나치게 겸손하게 낮추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매일 달리고, 가끔은 슬럼프에 빠지고, 나이가 들며 기록이 조금씩 떨어지는 걸 인정하는 모습을 그저 있는 그대로 서술합니다. 이런 담백함 덕분에 독자는 대단한 성취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수십 년간 꾸준히 반복해온 생활 그 자체를 들여다보게 됩니다.

달리기와 글쓰기를 나란히 놓는 구조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달리기에 관한 회고록이지만, 문장 곳곳에서 계속 글쓰기 이야기로 슬쩍 넘어갑니다. 달리며 느낀 신체의 한계와, 글을 쓰며 느낀 창작의 한계가 같은 언어로 설명되는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결국 이 책이 달리기에 관한 책이자 동시에 글쓰기에 관한 책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해석 — 왜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일까

하루키는 자신의 묘비명으로 삼고 싶은 문장으로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를 꼽습니다. 이 짧은 문장이 이 책 전체를 압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얼핏 대단한 성취를 자랑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주 소박한 다짐에 가깝습니다. 빠르게 달리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 기록이 신통치 않아도 괜찮다는 것, 다만 걷지는 않겠다는 것. 이 문장은 속도나 성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완벽하게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스스로 정한 규칙 하나만은 지키겠다는 마음가짐. 이것이 하루키가 수십 년간 소설을 쓰고 달리기를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읽힙니다. 결국 이 문장은 재능이나 속도가 아니라, 멈추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삶을 완주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이 책 전체를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 다만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루키는 이 책에서 자신이 특별히 빠른 러너도, 특별히 재능 있는 작가도 아니라고 여러 차례 말합니다. 대신 그가 붙잡고 있는 건 단 하나, 매일 정해진 만큼 몸을 움직이고 글을 쓰는 반복 그 자체입니다. 이 반복이 쌓여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책 전체를 관통합니다.


정리

목표를 향해 나아가다가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한계에 부딪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건네는 담담한 위로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빠른 성과나 화려한 재능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이 책은 그저 오늘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대단한 기록이나 눈에 띄는 성취가 없어도, 꾸준히 이어온 반복 그 자체가 의미 있다는 걸 이 책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증명해 보입니다.


내 생각과 감상평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느꼈던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저 매일 쓴다’는 태도가, 이 책에서는 더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언어로 다시 나타난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글쓰기라는 정신적인 행위와 달리기라는 신체적인 행위가 결국 같은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는 걸 확인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요즘 제가 이 블로그를 이어가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처음 서평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매번 새로운 책을 읽는다는 설렘이 컸는데, 몇 편을 연달아 쓰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 설렘보다 그냥 정해진 루틴을 지킨다는 감각에 가까워졌습니다. 책을 고르고, 읽고, 감상을 정리해서 글로 옮기는 이 과정이 매번 짜릿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날은 쓰고 싶은 마음이 넘치고, 또 어떤 날은 그냥 의무감으로 노트북을 켭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하루키 역시 매일 똑같이 의욕이 넘쳐서 달리거나 쓰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감정의 기복과 상관없이 그냥 하기로 정한 일을 계속했을 뿐입니다. 저 역시 거창한 동기부여 없이도 오늘 정해둔 분량만큼은 쓰고 마무리 짓는 것, 그 자체가 결국 이 블로그를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서 예전만큼 빨리 달리지 못한다는 걸 담담하게 인정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무언가를 오래 지속한다는 건 늘 최고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기복까지도 받아들이며 계속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저도 요즘 여러 가지 일—본업, 새로 준비하는 사업, 이 블로그까지—을 동시에 붙잡고 가다 보니, 예전만큼 어느 한 가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날들이 늘었습니다. 처음엔 그런 제 모습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습니다. 예전엔 하나를 시작하면 끝까지 몰입해서 해내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이것도 저것도 다 조금씩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런데 하루키가 자신의 기록이 예전만 못하다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저 사실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지금 제가 여러 일을 동시에 조금씩 이어가고 있는 것 역시 실패가 아니라 그저 지금의 제 페이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벽한 컨디션으로 하나에 몰두하지 못하더라도, 각각의 일을 완전히 놓지만 않는다면 그것대로 괜찮다는 것. 이 책이 건네는 위로는 결국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 책 다음에 읽으면 좋은 책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무라카미 하루키) : 같은 지속력이라는 주제를 글쓰기라는 관점에서 더 깊이 다룬 에세이입니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하루키가 전업 작가로 결심하게 된 그 시기에 실제로 쓴 데뷔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단 한 번의 삶》(김영하) :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룬다는 점에서, 다른 작가의 시선과 비교해볼 만합니다.

마치며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화려한 재능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수십 년간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글을 써온 소박한 기록입니다. 목표를 향해 가다가 지쳐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이 담담한 문장에서 뜻밖의 힘을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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